Глаголица

: 글라골문자

[형성 배경] 9세기 중반 슬라브 종족 중 최초로 거대 국가를 형성한 대모라비아제국의 황제 로스티슬라브(Ростислав)는 로마제국의 문화적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비잔틴제국에 사신을 보내 모라비아제국에서 슬라브어로 예배를 볼 수 있게 해 줄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비잔틴제국의 총주교 포티(Фотий, Fotij)는 863년 살로니카(Салоника) 출신의 키릴과 메포디를 사신으로 모라비아에 파견하였다. 살로니카는 비잔틴제국의 도시였지만 마케도니아와 인접했기 때문에 슬라브인들도 많이 거주했다.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그리스어와 슬라브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구사할 수 있는 그리스어-슬라브어 이중언어(двуязычие) 도시로, 키릴과 메포디 형제 역시 마케도니아의 방언에 능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식견 또한 탁월하였으므로, 모라비아제국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선교사이자 학자이었다.


[기원] 863년 모라비아에 도착한 이들은 그리스어 속기 이탤릭체인 초서체를 근간으로 하여, 일부는 고대히브리어 사마리아 문자와 콥트문자 등에서 차용하였고, 몇몇 철자는 타 철자체계의 모방품이 아니라 창작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철자 Ⰰ는 십자가 형상을 본떠 신성하고 거룩한 기독교 텍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철자체계의 제일 앞에 놓았다. 그리스어와 유사한 소리 [в], [г], [д], [е], [л], [м], [о], [п], [х] 등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철자를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그리스어에는 없는 슬라브어 소리, 예를 들어, 소리 [ ш’]와 [ ц’]는 사마리아 철자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라골문자의 기원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지만, 이 문자의 고안자는 슬라브족의 말을 적절히 기록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문자 체계를 완벽히 섭렵한 사람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체계] 글라골문자를 또 다른 고대교회슬라브어(старославянский язык) 문자인 키릴문자와 비교하여 표[1]로 나타냈다. 두 문자 모두 철자가 숫자 표현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수 의미도 제시하였다.


글라골

문자

수 의미

상응하는

키릴문자

철자소리철자명칭

글라골

문자

수 의미

상응하는

키릴문자

철자소리철자명칭



<Киевские листки>, <Зографское евангелие>, <Мариинское евангелие>, <Ассеманиево евангелие>, <Синайская псалтырь> 등이 글라골문자로 작성된 문헌에 속한다. 10-11세기에 작성된 <Зографское евангелие>의 일부[2]를 제시한다.



[글라골문자의 소실] 로마제국의 관할권에서 비잔틴제국의 종교를 전파한다는 것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864년 로스티슬라브가 불가리아와 독일 연합군에 패배한 후 모라비아제국에서 키릴과 메포디의 슬라브어 종교 활동에 대한 독일 사제들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이에 867년 두 형제는 독일-라틴어 성직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마 교황의 지원을 청하고 잠시 은신도 할 겸 로마로 여행을 떠난다. 콘스탄틴은 그곳에서 수도승이 되고 키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869년 사망하였고, 메포디 혼자 모라비아 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870년 독일의 지지를 받던 조카 스뱌토폴크(Святополк)가 로스티슬라브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슬라브어로 행해지는 종교의식이 금지되고, 메포디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885년 메포디가 사망하자 예배어로 슬라브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그동안 글라골문자로 작성된 종교 서적은 불살라졌다. 그의 제자들은 모라비아를 떠나 아드리아 해안지역, 크로아티아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로 대거 이주하며 메포디 형제의 20여 년간의 모라비아 선교와 문헌 활동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학문을 사랑했던 당시 불가리아의 황제 시메온(Симеон, 893-927)은 문헌 및 번역작업과 종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견함으로써 슬라브족의 종교적 학술 활동과 문화의 중심지가 모라비아에서 불가리아로 이동하며, 고대불가리아의 황금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이러한 환경에서 키릴과 메포디의 추종자이자 가장 재능있는 제자 중의 한 명인 클리멘트(Климент Охридский, 840-916)가 두 번째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그의 스승인 키릴을 기리기 위해 키릴문자(кирилица)로 명명하였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있는 키릴문자 형성에 관한 가설이다. 이 새로운 문자의 등장으로 복잡한 글라골문자는 빠르게 소실되었다. 현재 글라골문자는 크로아티아의 교회 문자로만 사용되고 있다.


연관 표제어


고대교회슬라브어(старославянский язык, old church slavic), 이중언어(двуязычие, bilingualism), 키릴과 메포디(Кирилл и Мефодий, Cyril and Methodius), 키릴문자(кириилица, cyrillic script)



참고자료

조남신·박수빈. 러시아어학개론. 서울, 2017.

Горшков А. И. Старославянский язык. М. 2002.

Истрин В. А. 1100 лет славянской азбуки. М. 1962, 1988 (2-е изд.)

Энциклопедический словарь-справочник лингвистических терминов и понятий. Русский язык. Т. 2. М., 2014.

Энциклопедия. Русский язык. М.,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