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ирилл и Мефодий
: 키릴과 메포디
<키릴과 메포디>[1]
[모라비아제국 파견 배경] 862년 슬라브 종족 중 최초로 거대 국가를 형성한 대모라비아제국의 황제 로스티슬라브(Ростислав)는 로마제국의 문화적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로마제국과는 달리,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고, 문화를 발전시키며 심지어 자국어 예배를 장려했던 비잔틴제국에 사신을 보내 모라비아제국에서 슬라브어로 예배를 볼 수 있게 해 줄 사제이자 학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로스티슬라프는 종교를 통해 비잔틴제국과 동맹을 강화하여 로마제국의 종교적 간섭뿐만 아니라, 모라비아와 이웃한 불가리아와 군사동맹을 꾀하고 있는 독일의 군사적, 정치적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이었다. 비잔틴제국의 입장에서는 모라비아에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여 적대적 관계에 있던 로마제국의 세력 확장을 차단하고, 갈등 관계에 있던 불가리아도 견제하고자 하였다. 모라비아제국과 비잔틴제국은 종교를 명분으로 상호부합하는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이해관계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잔틴제국 교회의 총주교 포티(Фотий, Fotij)는 863년 살로니카(혹은 데살로니카, 솔룬) 출신의 콘스탄틴(827-869, 키릴은 로마에서 사망하기 전 수여 받은 성자명)과 형 메포디를 비잔틴제국의 사신으로 모라비아에 파견하였다. 마케도니아와 인접한 살로니카는 비잔틴제국에 속하는 도시였지만 슬라브인들도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그리스어와 슬라브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구사할 수 있는 그리스어-슬라브어(마케도니아어) 이중언어 도시였다. 키릴과 메포디 형제 역시 마케도니아의 방언에 능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식견 또한 탁월하였으므로, 모라비아제국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선교사이자 학자이었다.
형 메포디는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비잔틴 지방의 군사행정관을 지내고 수도사가 된 반면, 동생 키릴은 처음부터 수도사이자 학자의 길을 걸었다. 『메포디 생애전』에 따르면, 비잔틴제국의 황제 미하일 3세는 이 두 형제를 사신으로 발탁하여 “Вы бо qста селоунÿнина, да седоунÿне вьси чисто словёньскы бесёдUVть” 당신들은 살로니카 지역 사람들이고, 모든 살로니카인들은 순전히 슬라브어로 이야기를 나누지요.”라고 말하며 모라비아제국에 파견했다. 이 문장은 ‘당신들은 비잔틴제국의 시민이므로 그리스어가 모국어이지만, 마케도니아 인접 지역인 살로니카 출생이고, 모든 살로니카 주민들처럼 당신들도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슬라브어도 잘 알고 있기에 모라비아제국으로 파견한다.’를 함의한다.
[모라비아제국 파견 이후 행적] 863년 모라비아의 수도에 도착한 이들은 최초의 슬라브어 문자인 글라골문자(глаголица)를 만들었다. 혹은 855년 이미 글라골문자를 만들어 모라비아로 떠났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관할권에서 비잔틴제국의 종교를 전파한다는 것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864년 로스티슬라브가 불가리아와 독일 연합군에 패배한 후 독일 사제들은 모라비아제국에서 키릴과 메포디의 슬라브어 종교 활동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졌다. 또한 서로마제국의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서 주님의 십자가에 비문이 새겨진 세 언어, 즉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로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성 3언설이 형성되며 모라비아에서 슬라브어로 기독교를 설교했던 키릴과 메포디는 이단자로 인식되었다.
이에 867년 두 형제는 독일-라틴어 성직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마 교황의 지원을 청하고 잠시 은신도 할 겸 로마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로마에서 아드리안 2세(Папа Адриан II)에 의해 융성한 대접을 받고 문자로서 그리고 교회 예배어로서 고대교회슬라브어를 인정받게 되고, 사제로 봉헌되어 그곳에서 성 베드로 교회를 포함하여 다른 교회에서도 고대교회슬라브어로 예배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콘스탄틴은 그곳에서 수도승이 되고 키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869년 중병에 걸려 사망하여 로마의 클리멘트 교회에 안장되었다. 메포디는 870년 대모라비아 제국으로 돌아왔으나 독일의 지지를 받던 조카 스뱌토폴크(Святополк)가 로스티슬라브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슬라브어로 행해지는 종교의식이 금지되고, 메포디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872년 메포디는 3년 동안 투옥되었으나 교황 요한 8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슬라브어 예배는 금지되었다. 874년에 대주교의 권리를 회복한 메포디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슬라브어로 계속 예배를 드리며, 879년 슬라브어 예배와 슬라브어 종교 문헌을 허용하는 교황의 칙서를 받아냄으로, 슬라브어가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와 함께 유럽의 성스러운 4대 언어가 되었다. 881년에 메포디는 마케도니아의 바실리우스 1세 황제의 초청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와 3년을 보내며 구약성서와 교부 서적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885년는 4월 메포디는 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장례식은 슬라브어, 그리스어, 라틴어의 세 가지 언어로 진행되었다.
[사망 이후 슬라브지역의 문헌 활동] 885년 메포디가 사망하자 예배어로 슬라브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그동안 글라골문자로 작성된 종교 서적은 불살라지고, 그의 제자들은 모라비아를 떠나 아드리아 해안지역, 크로아티아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로 대거 이주하며 메포디 형제의 20여 년간의 모라비아 선교와 문헌 활동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학문과 문화 융성을 애정했던 당시 불가리아의 황제 시메온(Симеон, 893-927)은 새로 옮겨온 수도 프레슬라브(Преслав)를 중심으로 문헌 및 번역 작업과 종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견함으로써 슬라브족의 종교적 학술 활동과 문화의 중심지가 모라비아에서 불가리아로 이동하였고, 이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키예프 루시에서 키릴과 메포디 제자들의 문헌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키릴과 메포디의 추종자이자 가장 재능있는 제자 중의 한 명인 클리멘트 오흐리드스키(Климент Охридский)가 두 번째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그의 스승인 키릴을 기리기 위해 키릴문자(кирилица)로 명명하였다는 가설이 아직은 가장 설득력있는 키릴문자 형성에 관한 가설이다. 즉 시메온 황제의 재위 기간인 893-927년 사이에 만들어진 새로운 문자 키릴문자는 키릴과 메포디가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 글라골문자를 급속도로 밀어내며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연관표제어
글라골문자(глаголица, glagolitic script), 키릴문자(кирилица, cyrillic script)
참고자료
조남신, 박수빈. 러시아어학 개론. 서울, 2017.
Караулов Ю. Н.(Глав. ред.) Энциклопедия. Русский язык. М., 1997.
Хабургаев Г. А. Старославянский язык. М.,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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